RoC/Log

Dog-eat-dog 上

2015. 7. 7. 22:16

물빛 하늘이 발코니 너머로 자욱이 번져 있었다. 레그나는 난간에 턱을 괴고는 풍경을 응시했다. 지상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상공에서는 온 도시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중앙의 첨탑을 둘러싸듯 돔 형식의 건물들이 인근에 몇 보였고, 동서남북 사방을 관통하는 대로 주위에 자잘한 건물들이 보였다. 넓은 인공 호수도 보였고 도심 사이에 떡하니 자리한 인공 삼림도 보였다. 이 높이에서는 모든 게 모형처럼 보인다. 도시의 통치자가 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녀는 검지로 난간을 두어 번 두드리고는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로 물었다. 


"어떠신가요, 이 곳을 감상한 광경은?"

"훌륭하군요."


뒤쪽, 방 안에서부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저음은 아니었으나 미성이었고, 묘하게 상대의 주의를 잡아채는 구석이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단정하게 차려 입은 청년이었다. 빛이 드는 곳으로 한 발짝 내딛은 그는 더 움직이는 대신 레그나의 어깨 너머를 응시했다. 갸름한 목소리가 다시끔 입술 너머로 흘러나왔다.


"이런 곳에서 머무신다면 기분이 상쾌하시겠습니다."

"상쾌하다 뿐은 아니지요."


레그나는 그제서야 몸을 돌려 남자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답했다. 입가에는 미소를 걸친 채였다. 난간에 가볍게 몸을 기댄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가닥가닥 흩날렸다. 


"이 곳을 제대로 살펴본 사람은 당신이 세 번째랍니다. 아시나요, 펠릭스?"

"…이런. 굉장한 영광을 누리게 되었군요. "


형식적인 감사의 말을 입에 담는 펠릭스에게 레그나는 긍정도 부정도 않은 채 바람을 맞을 뿐이었다. 펠릭스의 뒤로 테이블을 둘러싼 넓은 소파와 티 포트 등이 어렴풋이 보였다. 티 포트에는 물이 들어 있었으나 아까 전, 펠릭스가 차를 사양한 탓에 그 물은 차갑게 식어 있을 터였다. 바닥에는 기하학적인 무늬가 그려진 아이보리색 카페트가 단정히 깔려 있었고 벽에는 유화로 추정되는 풍경화들이 두어 개 걸려 있었다. 이 곳은 응접실이라고 불렸다. 응접실이라고 하여 실제로 손님을 맞는 곳은 아니었다. 첨탑의 최상층 바로 아랫층으로, 총수와 부총수만이 사용을 허가받고 그들에게 허락받은 이들만이 출입을 허가받을 수 있는 사실상의 출입통제구역이었다. 총수가 자리를 비운 지금은 그 권한이 오롯이 부총수에게 넘어갔고 레그나는 소수에게 이 곳의 방문을 허가했으나 그들 중 누구도 방 안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그런 공간이니 세 번째라는 말은 최초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총수, 부총수, 그리고 자신이리라. 펠릭스는 마른 입술을 축였다. 레그나가 말한 세 번째라는 뜻은 펠릭스가 생각했던 뜻과 달랐지만, 둘은 서로의 생각이 엇나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또한 중요한 건도 아니었다. 


"지난 성찬 때 저를 초대하셨지요. 그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이 응접실에 말입니다."

"그에 대한 감상은 이미 들었으니 생략하겠어요. 그보다는 다른 말을 듣고 싶네요. "


그들 정도 되는 위치에 있다면 서로간에 지켜야 할 허례허식이란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기 마련이었다. 모를 리 없음에도 레그나는 펠릭스의 의례적인 감탄사를 서두부터 잘라내었다.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방금의 상황은 그를 상대로 지나친 감이 없잖아 있었으나, 펠릭스는 별 반응 없이 대꾸했다.


"무슨 일을 도모하시렵니까."

"음."

"돔 내에서 가장 비밀스럽고 안전한 공간으로 꼽히는 곳이 두 곳 있습니다. 방문을 허용하되 실제로 방문할 수는 없는 곳, 그 어떠한 도청도 허용되지 않기에 덕분에 정치적 구설수에서 유일하게 깨끗함을 지킬 수 있는 장소. 이 곳은 그 중 '하늘' 쪽이지요."


이미 잘 아시겠지만요, 하며 그는 가볍게 어께를 으쓱했다. 


"과학자와 네피림의 협업관계란 전 인류의 규율과도 같습니다. 공적인 무언가를 도모하시려면 평소에 하셨듯이, 늘 쓰이던 장소 중 하나를 고르면 됩니다. 그럼에도 구태여 하늘의 길을 내어주셨다는 것은…사적이고, 은밀하며, 또 대중에게 공개되면 안 되는 종류의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지나친 비약일까요?"

"아뇨, 당연한 추측이죠. 기본이에요."


엘리멘트리라는 단어가 붉은 입술을 통해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는 그녀의 입술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자신의 입술에 손가락 끝을 문질렀다. 이유 모를 갈증이 이어지고 있었다. 티 포트로 손을 향하는 대신 그는 아까보다는 다소 빠른 속도로 말을 이었다. 


"대중에게 공개되어서는 안 되는 관계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정치적인 입지를 고려하자면 그 범위는 더욱 줄어듭니다. "

"이를테면?"

"당장 생각나는 것으로는 매장과 모살이군요. 저것들을 포함한 모든 반인륜적 행위가 있겠군요."

"오, 인류의 수호자를 자칭하는 우리인데 그 무슨 무서운 말씀을."  (키득임 소리가 들렸다.)

"밀애, 불륜을 포함한 성애적 행위."

"...."


느긋하게 맞받아치던 레그나의 말이 끊겼다. 꽤 오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펠릭스도 레그나도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크게 당황하거나 농담이었다는 말을 덧붙였을 만도 했지만 그들 간에는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았다. 양측 다 서로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펠릭스였다. 지금의 상황에 대한 주도권은 레그나가 쥐고 있었고 그는 시험받는 상황이었다. 감히 그를 시험할 수 있는 자격은 아무에게도 없었으나, 반대로 그녀가 시험하지 못할 사람도 없었다. 그 둘은 완벽히 동급이었다. 그는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한 발 물러서기로 했다.


"성애적 행위를 공표하는 것은 꽤나 오래된 전통입니다."

"결혼이라는 관습 자체가 거의 소실되었죠. 인간이 인간으로 있지 못했던 시기가 지나고, 다시 문화와 교양의 세계를 건설하는 와중에도 사람들의 인식은 쉽사리 바뀌지 않았어요."

"그래서, 어떤 종류의 이벤트입니까? 이 역시 인간을 다음 단계로 도약시키기 위한 과정의 하나인가요? 인간의 가장 큰 두 손이 서로 맞잡음으로써, 소실되었던 개념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문화적 발전을 촉진하게 하는?"

"펠릭스, 저는 근접하다고 했지 정답이라고 하진 않았어요."


레그나는 펠릭스에게 여전히 표정 변화가 없는 것을 보며 팔짱을 끼었다. 그는 시험을 통과했다. 정략혼은 그녀 자신의 의도를 끌어내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다. 그녀는 이 한 수를 위해서 평생의 정적 앞에서 스스로의 수준을 낮추는 것조차 주저하지 않았다. 한 걸음, 남자에게로 발을 옮겼다. 두 걸음, 유리알 같은 녹안이 차츰 가까워졌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가 되자 여자는 남자의 귓가에 무어라 소근거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숨소리의 간격이 흐트러졌음을 감지한 여자의 입꼬리가 살풋 올라갔다. 



.




"미스터 노아, 노드 님께서 찾으십니다."


흰 수트로 전신을 감싼 여성이 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로 그에게 전언을 전했다. 모니터 화면과 그래프들, 그리고 빼곡히 적혀내려간 종이 목록들이 메우고 있는 방의 중앙에는 검정색의 가죽 의자가 보였고 한 남자가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다. 그는 고개를 아랫쪽으로 떨구고 무언가에 골똘히 전념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큼지막한 모니터에서는 끊임없이 알 수 없는 문자와 숫자의 배열들이 산출되고 있었다. 여성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눈은 감겨 있었고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뻣뻣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비단 보안의 문제만이 아닌 이 방의 주인에 대한 예의이자 관례였다.


"5분 내로 찾아뵙겠다고 전하세요."


사무적인 말이 떨어지자마자 여성은 아무 말 없이 뒤돌아서 나갔고 펠릭스는 다시끔 방해 없이 생각에 골몰할 수 있었다. 수많은 기계적 장치가 끊임없이 가동되고 있었음에도 방 안은 고요했다. 세상에서 단 둘뿐인 장소. 그 하나가 저 까마득한 창공에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다른 하나는 깊은 땅 속에 파묻혀 있었다. 윗선에서는, 레그나의 방을 하늘이라고 불렀고 펠릭스의 방을 지하라고 불렀다. 은유적인 표현이었다. 환기를 위한 통풍구 정도는 있었지만 창문을 포함해 인간적인 소품 하나 없는 방은 늘 어둑어둑했고 비릿한 금속 냄새가 풍겼다. 대대로 최고의 과학자가 사용해 왔던 방의 현재 주인은 전대 테크노크라트였던 노드가 손수 길러낸 후계자이자 현 테크노크라트인 펠릭스 노아였다. 

늙은 조부의 위업을 이어받는 청년의 계승식에서 일부 노(老)장로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몇백 년의 무게를 과연 저 청년이 감당할 수 있을까? 대답은 여론이 말해주었다. 새 지도자의 취임에 정치판은 한동안 살얼음판이었고 여우같은 계집은 드높은 천공의 테라스에 몸을 둔 채 눈을 빛내며 이쪽을 예의주시했다. 그러나 따가운 수백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새 지도자는 잘해주었다. 노드가 처리해 오던 일을 무리 없이 이어받았고 업무의 진행은 순탄하게 순항의 돛을 펼쳤으며 정치적 능력도 흠잡을 데 없이 빼어났다. 그야말로 이쪽을 위해 만들어진 인간 그 자체였다. 장로들은 그제서야 흡뜬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1년 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