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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

2014. 9. 10. 17:56

비가 추적추적 떨어졌다. 고개를 들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각막에 물을 떨구었다. 모닥불을 피우려던 남자가 성화를 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어지간한 능력자가 아닌 이상 불을 피우기 힘들었다. 남자는 중앙에서 도태될 만한 하급 능력자였고 그의 힘으로는 온기를 일으킬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에이, 씨발. 상스러운 욕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는 운이 없었다. 눈이 왔으면 왔지 비가 오는 날은 드물었다.

화를 삭이지 못하던 눈동자는 이내 나에게로 고정된다. 화풀이라도 할 셈인가. 예상은 틀렸다. 그는 단지 나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을 뿐이다.


“칙칙한 하늘색 로브 좀 벗으쇼.”


타인이 보기에 많이 답답해 보이는 모양이다. 하긴, 회색은 그리 호감가는 색은 아니었다. 언제부터 회색이 하늘색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늘색은 오히려 내 머리색에 가까웠으나 어느 누구도 하늘을 인용해서 말하지는 않았다.

인간의 적응력은 대단해서, 어떠한 초자연적 변화도 대재앙 때문이지 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되었다. 어쨌든 후드를 벗었다. 차가운 액체가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차마 눈이 되지 못한 하늘의 유실물이다. 저쪽으로 걸어가는 남자와 휑뎅그렁하게 놓인 장작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에는 저 멀리 솟은 빙하가 배경으로 보였다. 아무리 비가 내려도 얼어붙은 땅은 녹지 않았지만 눈이 내릴수록 더욱 견고해졌다.


오랫동안 걸터앉았던 하체가 뻐근했다. 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시야가 일그러졌으나 딱히 보아야 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문제될 건 없었다. 비닐을 들고 걸어오던 남자가 힐끗 나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장작에 비닐을 덮는 것을 잊은 모양이다. 덥수룩한 머리카락과 수염 사이로 송글송글 물방울이 맺혔다.

비, 얼음, 추위. 세상은 세 가지로 정의할 수 있었다. 능력자가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세상이었다. 특히, 불을 피울 수 있다면 그 활용도는 무궁무진했기에 그 능력자는 권위와 지배력을 가졌다. 저 남자도 비록 능력이 미약하다고는 하나 작은 부족 하나쯤은 점령할 수 있었다. 발화능력자란 능력의 강도에 상관없이 추앙받는 대상이었으니까. 이 사실을 그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아까부터 나에게 불만 어린 눈총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중앙에 머물렀다는 증거인 지식과 바깥 능력자다운 권위의식. 그렇기에 날 함부로 내쫓을 수도 없겠지. 딱히 남아있을 이유도 없었기에 떠나라는 말 한 마디면 순순히 걸어나갈 텐데도 그는 아무 말 않고 그저 행동으로 속내를 표현했다. 


지레 겁먹은 게지. 내 안에서 추이를 지켜보던 목소리가 평했다. 나는 당신 때문이라는 말을 굳이 덧붙이지는 않았다. 


남자가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며 담배를 꺼내다가 다시 욱여넣는다. 기세가 약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고 남자는 다시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문득 그가 짓씹듯이 말을 꺼냈다. 


“제기랄 놈의 비. 춥지도 않소?”

“그다지.”


대답이 어이없었는지 그는 위아래로 내 얼굴을 훑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하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병자 꼴이요.”

“그런가요.”

“후드라도 다시 쓰시지 그러오?”


혹여라도 쓰러지면 뒈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이오, 하며 남자가 투덜댔다. 결론은 시체 치우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중앙도 아닌 바깥에 제대로 된 의료설비가 있을 리 없었고, 설령 있다 한들 무상으로 상대에게 자비를 베풀 리 없었다. 후드를 다시 썼다. 방수가 되는 천이었지만 고였던 물이 흘러내렸다. 


“…무슨 목적으로 왔소.”


방랑자에게는 목적지가 없다. 뻔히 아는 사실을 묻다니. 아마도 그 역시 대답은 기대하지 않고 물었으리라. 


“발걸음 닿는 대로 걸었어요.”

“당신에 대해서는 바람결에 들었소.”


그는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떤 내용일지 짐작은 갔다. 방랑자는 태평한 자로 취급받았고 수도 적었다. 오래 떠돌아다닐수록 지니고 있는 능력이 강대하다는 증거였으므로 얼굴이 익히 팔린 자들은 중앙에서도 이름이 거론되곤 했다. 올해로 어림잡아 10년, 중앙에도 머무른 적이 있다지만 확실히 긴 시간이었다. 나티시 바로 다음가는 햇수일 것이다. 막 중앙을 떠났을 때에도 그녀는 방랑자로 제법 이름이 있었다. 


“어째서 중앙으로 돌아가지 않는 거요.”


흐르는 빗물을 훔치면서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 대부분의 방랑자는 중앙 출신이었으니 그가 추측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정쩡한 능력으로 도태된 남자는 바깥 냄새가 풍겼으나 여전히 중앙인으로써의 자의식이 남아 있었는지 군림하기보다는 중앙 근처에 홀로 거처를 잡는 것을 택했다. 그런 그였으니 나를 포함한 방랑자들이 고깝게 보이기도 할 테다. 


“돌아갈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대답임을 알면서도 솔직하게 답했다. 


어이, 너야말로 가출이나 다름없다고 말해 주지 그래. 심술궂게 끼어든 목소리를 무시한 채 후드를 고쳐 썼다. 


괜히 부족이 있는 게 아니고 독재적 군림 체제가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다. 애매한 자존심과 긍지는 바깥에서 생존의 걸림돌일 뿐이었다. 머지않아 고집을 꺾고 소규모의 부족 위에 군림하게 될 남자는 방금까지 내가 바라보던 빙하를 향해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녀가 세운 능력자들의 사상은 인류의 발전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혹한의 세상을 이길 수는 없었다. 돔을 나온 중앙의 사람들은 바깥을 견디지 못하고 변화하거나 죽었다. 비가 그치면 이 곳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고는 흰 입김이 흩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중앙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걸요.”


내가 먼저 말을 건넨 적이 없었기에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줍잖은 동정심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랐으나 내 의도는 아니었다. 무료함을 견디지 못한 목소리의 장난질이었다. 내 입을 빌려서 말한 주제에 한 마디 하고서는 바로 들어가다니. 지금껏 그의 존재에 불편함을 느낀 적은 없었지만 이렇게 대외적으로 몸을 사용한 적은 처음이었다. 


팻말이라도 꽂아두고 가지 그래? 


즐거운 듯한 어조에 고개를 살며시 갸웃거렸다. 


어차피 죽을 텐데 묘비라도 미리 만들어 주자고. 

귀찮아. 


남자의 죽음을 확신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얼어붙은 땅을 파낼 마음은 없었다. 신경쓸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감각이 무뎌진 다리를 가볍게 움직였다. 어느새 남자는 장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저 한편에 팻말처럼 꽂힌 나무판자 몇 개가 보였다. 남자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것이다. 내가 이 곳을 방문한 게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도. 


물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곤 일어섰다. 


비가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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