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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 시간

2016. 10. 5. 05:34

White Time



 인사는 놀랍도록 부드럽게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제가 생각해도 목숨을 위협받던 사람이 목숨을 위협했던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남자의 눈에서 그런 기색이 읽혀졌다. 


 일이 이렇게 된 발단은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 *


 날이 좋지 않았다.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쳐 한 치 앞길이 보이지 않는데다 해가 빨리 지는 겨울이라 더더욱 그랬다. 12종류의 학문을 모조리 복습하고 마법도 들여다보았으며 들어온 정보를 재검토하는 작업까지 끝내자 시간은 어인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열다섯 소년의 일정은 어른이 하는 양과 맞먹었다. 모든 일을 끝내자마자 키리에는 옷장에 가서 간단한 외출용 의복으로 갈아입었고, 후드가 달린 무겁지 않은 망토를 덧대었다. 걸어잠근 창문 너머를 힐끗 곁눈질하니 온통 깜깜했다. 시간이 어지간히도 늦었으나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마지막 하나를 처리해야 했다.  레마티온 남작과의 비공식적인 약속이 있었다. 미리 연락하지 않았으므로 열 시 경에 방문할 생각이었으나, 갑작스런 폭설에 업무에 차질이 생겨 계획이 어그러지고 말았다. 기후 탓을 할 것 없이 명백한 그의 실수였다. 예민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준비는 기본이 아니던가. 다행히 흠이 될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성찰에는 충분한 계기였다. 단추를 꼼꼼히 잠그고 포털을 타기 위해 방 밖으로 나와 아래층으로 걸었다. 후작의 시중을 드는 하인이 고개 한번 들지 않은 채 옆을 스쳐지나갔다. 아직 후작의 업무가 끝나지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이 잠깐 머물렀으나 포탈 앞에 서기 전에 사라졌다. 다소곳이 그를 기다리고 있던 디아나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올해로 서른 후반에 접어드는 그녀는 뛰어난 호위였고, 키리에는 외출하며 종종 그녀를 대동했다. 파센느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한 그녀가 절대적으로 복종할 것을 알았다. 자신이 아닌 가문을 향한 충성심이었으나 이런 게 외려 신뢰하기 쉽다는 것도 알았다. 곧 가문과 자신은 완전히 동일시될 예정이었으므로. 

 포탈이 작동되었고, 눈 앞이 흐려지더니 익숙한 벽의 문양 대신 생소한 풍경이 펼쳐졌다. 레마티온 남작저는 처음이었다. 남작의 간단한 프로필과 가족 구성, 그리고 먼 옛날 그의 가문이 한 짓에 대해서는 알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이제 알게 되었으나 곧 무용해질 정보였다. 

 입가에서 흰 김이 나왔다. 현관으로 걸어가는 동안 눈이 어깨에 쌓였다. 달이 거의 고개를 내밀지 않아 길이 어두웠다. 주위에는 온통 눈으로 덮여 희었다. 날은 어두운데 땅은 밝다니, 모순적이었다. 그는 푹푹 빠지는 발을 들어 마침내 문 앞에 도착했다. 디아나가 종을 당겼다. 늦은 시간에 남의 집을 방문하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예절과 법도라면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종을 두어 번 더 당겼음에도 사람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며, 키리에는 눈을 깜빡였다. 그럼에도 해야 하는 일이었다. 


 문은 그냥 열렸다. 돌아갔다가 내일 온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디아나는 무표정하게 문을 당겼고, 원래부터 잠긴 적 없다는 듯이 그대로 열렸다. 디아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에게 표정 변화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구태여 이쪽을 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내려야 할 명령은 명백했다. 문 너머에서는 묘하게 싸한 느낌이 났다. 돌아서서, 떠난다. 그러나 곧 원래의 목적이 떠올랐다. 후작은 어떻게 일을 처리하건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후작이 이러한 상황을 예상했을까? 전적으로 제 손에 맡긴다고 했으나 그가 섣불리 저에게 모든 것을 쥐여줬을 리 없었다.  이건 다른 종류의 시험인가? 잠시 이쪽을 바라보던 디아나가 고개를 숙이고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 느껴졌다. 모든 불확실성과 미확인을 경계하고 살아왔음에도 이 문을 열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의 말이 여즉 귓가에 생생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당시의 풍경이 똑똑히 머릿속에 그려졌다. 



* *



 후작의 집무실은 성품을 드러내듯 각진 대리석 가구에 간촐하지만 우아한 장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흰 벽에 흰 가구, 들어설 때마다 사방이 전신을 비추는 것 같은 곳이다. 발자국조차 남지 않는 바닥을 밟으며 카페트 바로 앞에 섰다. 키리에는 책상을 주위로 깔린 바닥의 카페트만은 밟지 않았다. 늘 그 앞에 섰다. 일종의 선이었다. 먼 미래에 그가 후작이 되면 밟을 수 있을 것이다. 

 예의바르게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선 지 몇 분이 지났을까, 의자가 천천히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창 쪽을 보던 후작의 시선이 와닿는 게 느껴졌다.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후작에게 제일 먼저 배운 것은 그 시선이었다. 사람을 무기질 보듯 볼 수 있는 눈빛. 인간성마저 득실의 가치로 볼 수 있는 눈이었다. 


 "이번에…남작가 하나가 반기를 들었다. "


 종이 사그락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숙인 채였지만 키리에는 그의 모습이 어떨지 쉬이 상상할 수 있었다. 서류를 넘기는 반지 낀 손과 냉랭한 눈초리. 파센느 후작은 말이 많지 않았음에도 강렬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하는 법을 알았다. 넓고 조용한 집무실에 하나의 목소리만 천천히 울렸다. 


 "레마티온을 아느냐?"


 레마티온. 지금보다 한 세대 전에 키나스톤과 파센느의 전쟁이 끝물에 이르를 무렵, 전장에서 공을 세운 신생 남작가였다. 단순히 사람을 죽고 죽이는 공에서 넘어서서 원래 키나스톤에 몸을 담았던 그는 전쟁을 틈타 키나스톤의 크고 작은 비밀들을 물어왔다. 그리하여 파센느의 눈에 들었고, 종전 후 작위를 받았다. 그 후로도 키나스톤의 정보 수집을 주력으로 했으나 세력이 큰 곳은 아니었다. 있으면 좋고 없으면 어쩔 수 없고, 딱 그 정도의. 정확히 표현하자면 레마티온의 정보는 유용했으나 그 정보만 정보가 아니었다. 파센느는 오늘도 수많은 정보망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키리에가 알고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그는 후작의 물음에 긍정했다. 


 "한 번 주인을 문 개는 두 번도 문다지."


 이쯤되니 상황은 짐작이 갔다. 그 작은 남작가는 어느 쪽으로건 선을 넘은 모양이었다. 후작의 목소리가 머리 위로 계속 들렸다. 


 "이번에 가져온 정보 중 키나스톤에게 실질적인 타격을 줄 만한 게 있었다. 키나스톤 쪽에서 눈치를 챘고."

 "그것만으로는 반역죄로 몰 이유가 충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보통 그들의 대화는 후작의 말을 경청하고 마지막에 키리에가 확인차 대답하는 식으로 이루어졌으나, 목적과 정보가 불투명한 대화에서는 달랐다. 그는 후작의 의중을 짚어내어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야 했다. 근 몇 년 간 익숙히 해온 일이었다.


 "물론. 남작 또한 그 사실을 알아. 그의 성격상 이쪽의 정보도 상당수 빼돌려 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실제로, 요새 그의 행보가 의뭉스러워."

 "먼저 처리합니까?"

 "그래. 네가 한다."


 기껏해야 정보의 처리나 뒷공작을 맡길 거라고 예상했는데, 예상 외의 통보였다. 아직 열 다섯 살짜리가 독단적으로 맡기에는 무거운 감이 없잖아 있었다. 실수라도 하면 추문이 돌 게 뻔했다. 고개를 숙인 채로 눈을 깜빡였다. 지금껏 잘해왔다고 생각했고, 후작이 지금에서야 자신을 잘라낼 꼬투리를 잡았다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그러니 이건 시험이었다. 어디까지 후작이 손을 써 두었는지 몰라도 표면적으로는 오롯이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한동안 잠잠하다 싶더니. 


 "이 일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후작답지 않은 덧붙임에 그답지 않은 내용. 키리에는 허리를 펴고 후작을 응시했다. 눈이 마주쳤다. 후작의 눈은 북해를 닮았다. 먼 북쪽의 바다를 실제로 본 것은 한번뿐이었으나 아직도 그 첨예한 기류가 잊히질 않았다. 언젠가 그는 저 자리에 설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문득 북해의 서늘함이 그리워졌다. 공손히 인사하고 집무실을 나섰다. 


* *



 모든 계획은 완벽했다. 마지막 조각은 남작을 직접 대면해 보다 확실한 증거와 명분을 만드는 것이었다. 남작에게 부러 통보하지 않은 이유는 이것이었다. 최종적인 확인과 생생한 반응을 위해. 이미 사전작업은 끝났으므로 그가 발버둥쳐도 살아나갈 구석이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천대받을 줄이야. 어둠이 내려앉은 실내는 고요했다. 바깥보다는 따스했으나 정체된 공기 특유의 안온함이 느껴지질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깥에서도 어렴풋이 느껴졌지만 집 안에 들어서니 확신할 수 있었다. 마나가 불안정하게 흐르고 있었다. 인위적인 흐름, 억지로 끌어낸 것 같은 절박함. 서늘함이 불길하게 몸을 파고들었다. 디아나가 조심스레 앞장섰다.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조용히 보고했다. 인기척은 없습니다. 잠시 여기 있으라는 말과 함께, 디아나가 뒤쪽으로 향했다. 사용인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일까. 그녀가 인기척이 없다고 말했으니 이 저택이 무슨 일을 겪었건 간에 지금은 안전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다. 그렇다면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조용히 손을 귀걸이에 올렸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여, 마법사라면 제 몸을 지키는 수단은 그것이었다. 지저분하게 흐트러진 마나의 흔적 때문에 마나를 전개해도 크게 티가 나지 않을 것이다. 마법사라면 어렵지 않게 알아보겠지만 저택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흐름은 하나, 남작이 마법사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정보였다. 다른 기척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걷는 것에는 능해서 조심스레 2층의 층계로 올랐다. 남작은 이미 산 사람이 아닐 확률이 컸다. 키나스톤이 먼저 손을 쓸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더러운 일을 그쪽에서 해준다면야 파센느에선 아쉬울 게 없었다. 단지 후작이 언질주었던 것, 파센느의 정보를 빼돌렸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그의 죽음은 주인이 처리하는 편이 나았다. 키나스톤보다 먼저 걸음하려고 늦은 저녁에도 걸음했건만. 아버지가 이 모든 것을 어디까지 알고 안배했을지 확신할 수 없어서 목이 홧홧했다. 실패란 언제나 거리가 먼 단어였고, 용납될 수도 없었다. 이 또한 성공으로 이르는 과정 중 하나로 만들어야 했다. 그러니 이 상황을 최대한 유리하게 수습하기 위해 지금 이렇게 걷고 있는 것이다. 그 끝에 무엇이 있더라도. 

 키리에는 복도를 걸어 남작의 집무실 앞에 섰다. 꼭 후작의 집무실을 떠올리는 문이었다. 뻗어나가는 손에 망설임은 없었다. 



 상황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갑자기 닥쳐든 빛에 눈이 부셨다. 눈 깜빡일 새 없이 방 안의 풍경을 살펴보기도 전에 몸이 멈추었다. 전신을 피와 무기로 무장한 남자가 단검을 정확히 목젖 위에 겨누고 있는 상황이라면 누구나 그랬겠지만. 


 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남자의 숨소리도 들렸다. 그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피비린내가 났다. 붉은 눈이, 핏물이 고인 홍채가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냈다. 순간적으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1초. 아무도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2초, 문득 칼날이 움직이지 않고 있음을 알았다. 


 마법으로 상대를 겨누기도 전에 칼날이 들이박힌 것을 보면 이미 자신의 거동을 파악하고 기다렸음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그대로 내리긋지 않는 이유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자연스레 도출되는 결론은. 

 그는 키나스톤의 암살자였다. 명료했다. 그리고 칼을 내리긋지 않았다. 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미래까지 내다본 찰나의 갈등일 것이다. 누군가가 부리는 개라면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무엇보다, 키리에는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을 또 한 명 알았다. 마치 자신이 아버지를 보며 북해를 떠올리듯 이 남자에게서는 거친 흙먼지 내음이 났다. 



 그들은 초면이 아니었다. 



 "…절, 죽일 건가요?"

 "……마나 전개를 거두세요."


 모든 것은 가설에 지나지 않았으나 죽음 앞에서는 그 불확실성이 빛을 잃었다. 뻔하다면 뻔한 물음에 남자는 간접적인 말과 직접적인 행동으로 답했다. 칼이 느릿하게 거두어지고 목에서 칼이 떨어졌다. 이로써 다음에 할 말은 보다 수월했다. 


 "마커스 키나스톤을 알아요."


 호흡은 사뭇 떨렸다. 생각의 흐름은 명료했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몸이 제어를 벗어났다. 제 얼굴이 어떻게 보이는지 궁금했다. 남자에게 제 말이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지 알 방법은 그의 반응뿐이었다. 


 잠시 남자 너머로 눈길을 주었다. 인기척이 없다고 했던 디아나의 말과는 달리 방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샹들리에에 목을 맨 시체가 하나, 바닥에 뒹구는 것들이 세넷. 아이가 갖고 놀다 버린 것마냥 팔다리가 무토막처럼 찢겨 구석구석에 던져진 채였다. 공기는 텁텁했고 흰 벽과 바닥에 고인 핏물은 밟으면 찰박이는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전부 죽은 사람들이었다. 남자와 자신을 제하면. 

 보통의 인간이라면 진작에 주저앉아 비명을 지르거나 혼절했을 것이다. 보통의. 그 단어가 유독 혓바닥에서 잘 굴러가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목젖에 맞닿아 있던 쇠붙이 때문일지도. 


 목 매달린 시체와 눈이 마주쳤다. 뒤집어진 흰자에 초점이 없었다. 알란드 모베스 레마티온 남작. 주인에게 처분당하는 것과 전 주인에게 보복받는 것, 그의 운명은 어차피 어느 쪽이어도 같았다. 죽을 운명. 그 역시 살기 위해 발버둥쳤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죄가 무마될 수는 없었다. 파센느 후작은 그의 처분을 결정했고 키리에 파센느는 가문을 위해 존재하는 자였다. 가문에 해악을 끼칠 자를 처분하는 것 또한 업무 중 하나였다. 그 어떤 것이라도 해낼 수 있었고, 누구라도 죽일 수 있었다. 그럴 수 없다면 그 역시 가문에게 처분당해야 마땅했다. 

 남작은 죽었다. 가문의 식솔들도 모조리 죽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느 작은 연회장에서 수줍게 손을 내밀던 금발의 여식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그녀의 말도 어렴풋이 기억할 수 있었다. 영식 같은 분을 만나고 싶어요. 소원입니다. 두 손을 그러모으고 말하던 작은 남작의 딸은 그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그의 소원은 언제나 하나뿐이었다. 가문과 지위를 떠나서, 지극히 인간의 본성에 맞닿은 소원. 살고 싶었다. 살기 위해서 가문을 이어야 했다. 그걸 위해서 키리에는 인간으로 불릴 수 있는 모든 이유를 포기할 수 있었다. 


 아까부터 몸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도, 흥분도 아니었다. 시야는 맑았고 이성이 뇌리를 지배했다. 지극히 제정신이었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가 언제부터인지 역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상쾌했다. 시체와 피의 공간에서 비린내를 들이마시고 호흡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지금, 역설적이게도 가장 죽음이 가득한 공간에서 그는 본인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그제서야 정의할 수 있었다. 이것은 생에 대한 환희였다. 흥분이라기엔 정제된, 두려움과는 외려 거리가 먼. 


 그는 깨달았다. 자신은 죽지 않을 것이다.


 "알케나인 베텔기우스 키나스톤."


 색이 짙어진 홍채를 응시하며 키리에는 옅게 미소지었다.


 "안녕하세요?"



* *


 마커스 키나스톤을 사교계에서 마주한 적이 있었다. 자연히 그의 아들도 볼 기회가 있었다. 알케나인 키나스톤은 가문의 직계로 태어났음에도 일반인이었다.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귀족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는 마법사인 그도 필요 이상으로 잘 알았다. 

 키나스톤 후작은 전형적인 귀족이었다. 제 아버지가 그렇듯이. 바꿔 말하면 제 아버지를 대하듯 생각하면 되는 사람이었다. 귀족들이란 작위가 위로 올라갈수록 더욱 지저분해지는 법이었다. 지저분하고 유용한. 



 벽난로가 여즉 타고 있었다. 하인이 추운 겨울 주인을 위해 가득 채웠을 장작이었다. 


 "확실히 이 방법이라면 일반인이어도 가문에 도움을 줄 수 있겠네요."


 분위기를 환기하려 던진 말에 답이 없었다. 별다른 답을 기대하진 않아서, 방 안으로 걸어들어온 후 문을 닫았다. 알케나인은 손을 내렸을 뿐 칼을 거두지는 않았고 키리에도 마나 전개를 풀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으리라 판단했으나 만일의 상황이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었다. 사실, 죽이는 편이 더 깔끔하고 효율적이지 않은가.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어떠한 감정을 읽어내기 힘들었지만 지금도 그의 내면에서는 상황에 대한 치열한 저울질이 이루어지고 있으리라. 혹은 이미 결정했던가. 키리에가 할 일은 이를 토대로 한 협상과 교섭이었다. 


 "키나스톤은 저희의 영지에서 휘하의 남작가를 몰살시켰습니다. 누가 봐도 명백히 불명예스럽고 잔혹무도한 행위지요."

 "그 가신이 키나스톤에 씻을 수 없는 모욕을 주었고, 그걸 보면서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신 건 아닐 텐데요."

 "이건 너무 적나리하지 않습니까. 뒷일을 생각하지 않으시는지."

 "처리할 수 없는 목격자는 상정 밖입니다만…그래도 영식께서 원하시는 만큼 타격이 있진 않을 겁니다." 


 키나스톤 후작의 비호가 있을 것은 자명했다. 친아들에게 더러운 일을 시키면서 일처리를 허술히 할 리 없으므로. 알케나인은 그걸 지적했다. 


 "……숨어들어온 만큼 그만한 대가를 치를 생각은 있습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하실 분으로 보이지 않으니."


 그리고, 저쪽이 먼저 굽히고 들어올 것도 예상 가능한 범주였다. 키나스톤 후작 역시 크건 작건 타격을 입는 게 달갑지 않을 터였고 저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부터 이러한 상황을 예측할 수 있었으므로. 

 물론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지나치게 태연한 태도 뒤로 후작의 말이 들렸다. 가문의 정보를 상당수 빼돌려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후작이 어디까지 상정하고 대비했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싶지 않은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선물을 하나 주시겠습니까? 소소히 대가를 치르신다고 생각하시고."

 "…선물이군요."


 돌아가서 일을 원활히 끝내어 후작이 어디까지 대비했는지를 알아야 했다. 당장 요구할 게 마땅치 않으면 미래를 저당잡아도 좋으리라. 알케나인도 그 뜻을 이해했는지 이것으로 약점을 잡혔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태도에 주눅듦이라고는 보이지 않았지만. 


 문제가 일단락되어 아까와 같이 정적이 찾아왔다. 키나스톤이 모든 일을 끝냈으니 더 돌아다닐 수 없었다. 이대로 포탈로 향해도 되겠지만 그와 대면하는 것도, 이런 상황에서 대화할 수 있는 것도 흔치 않은 기회라는 생각에 발걸음이 멈추었다. 키나스톤의 둘째가 공식적인 식장에 잘 나오지 않는 것은 사교계에 잘 나서지 않는 키리에도 언뜻 들은 적이 있었다.

 남부럽지 않은 가문의 직계로 태어나 찌꺼기를 줍는 사냥개 역활이나 하는 신세, 누구는 그걸 동정하겠지만 키리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나마 가문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 삶을 연명하는 것 또한 나쁘지 않은…


 문이 열렸다. 

 시선이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두 명의 남자였다. 키 큰 이와 덩치가 우람한 이. 알케나인과 비슷한 차림에 이곳저곳 찢겨 피가 흐르는 채였다. 덩치가 우람한 쪽은 손에 금발의 머리채를 쥐고 있었는데, 바닥에 질질 끌려온 인영은 그도 익히 잘 아는 사람이었다. 

 키나스톤 후작이 가문의 치부를 허술히 다룰 리 없었으므로 알케나인이 홀로 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화하는 내내 나타나지 않아 이미 자리를 떴거나 디아나랑 마주쳤겠거니 했고, 당연하지만 전자를 바랐다. 디아나는 실력 좋은 사용인이었으나 정장 둘을 동시에 상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유능한 사용인이었는데. 돌아가는 대로 인원을 보충해야겠다. 그리 생각하는 찰나 남자들의 시선이 일순간 이쪽으로 쏠렸다. 주인을 닮아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대한 당혹스러움이 느껴졌다. 


 사냥개들의 시선이 주인에게 향하는 것을 보며 키리에는 알케나인에게 말했다. 이미 판단은 끝났기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처리하시죠."


 알케나인이 탐색하는 것마냥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이유를 물었다. 질문이라기엔 지나치게 평이한 그 말에 키리에는 제게 위험한 그쪽 전력은 줄여야지요, 같은 말 대신 합당한 사유를 댈 수 있었다.


 "목격자가 있으면 말이 새는 법입니다."


 지금의 저처럼. 뒤에 생략된 말을 알케나인도 키리에도 알았다. 무어라 반박하는 대신 덤덤하게 합리적이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인 알케나인이 상황파악이 덜 된 것 같은 남자들을 향했다. 


 "자결해라."


 평생 가문에 충성하며 마지막까지 가문을 위해서. 이 방 안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삶의 방향이 흡사했다. 예, 작은 도련님. 디아나를 끌고 올라온 덩치 큰 남자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들어 주저없이 가슴팍에 칼날을 찔러넣었다. 더 이상 지탱해줄 손이 없어 바닥에 헝크러진 금발 위로 피가 쏟아졌다. 다른 남자는 본능적으로 머뭇거렸으나, 알케나인은 망설이는 기색 하나 없이 단검을 빼들고 그의 앞에 걸어가 그의 동료와 같은 끝을 맞이하게 도와주었다. 알케나인의 등에 가려 남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 문을 열어제꼈던 그 때처럼 상황은 빠르게 진행되었고, 차이점이라곤 상황을 겪는 당사자와 지켜보는 방관자의 입장 정도였다. 


 피가 줄줄 흐르는 칼을 내려트린 채 알케나인이 몸을 돌렸다. 칠흙으로 빚은 가면인 양 표정 하나 없는 얼굴에서 죄책감 같은 앳된 감정을 찾기란 힘들었다. 문득, 그가 피로해한다고 느꼈다. 어느 구석에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 *



 "눈이 많이 옵니다. 오늘 떠나는 건 힘들겠어요."


 포탈이 흐릿하게 깜빡거렸다. 잿빛 하늘은 여전히 눈을 토해내어 시야를 어지럽히는 중이었다. 기후가 불안정한 날에는 마법의 구동이 불안정하곤 했다. 시기 적절하게도. 키리에는 알케나인을 힐끗 보았다. 


 "그렇군요."


 그는 딱 한 마디를 했을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시체와 피가 흥건한 집에서 단 둘이 밤을 보내야 하는 사실에도 개의치 않아 하는 것 같았다. 결국 그들은 다시 아까의 그 방으로 걸어들어갔다. 저벅저벅 걷는 구둣발 끝에 피에 젖은 살조각들이 채였다. 밧줄에 목매달린 시체, 잘린 팔다리와 한때 제 부하들이었던 시체를 넘어서 알케나인은 구석으로 걸어가 앉았다. 그가 이 곳에 있겠다면 키리에도 이 곳에 있어야 했으니 벽난로 근처의 소파에 자리잡았다. 마치 방금 전까지 사람이 앉아 있었던 것마냥 안락하고 푹신했다. 


 "다른 시체들은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개들에게 던져주었습니다."


 그 대답을 마지막으로 알케나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눈은 아까보다 짙게 보였다. 시계는 어느덧 두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둘 다 잠을 자진 않았다. 알케나인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키리에도 자연스레 같이 창 밖에 뜨는 해를 보았다. 당초 알케나인이 자건 말건 키리에는 잘 마음이 없었으니 그에게는 평범한 밤이었고 알케나인은 잠을 청하지 못했으니 좋은 밤은 아닐 것이었다. 창 밖이 점차 밝아지며 서늘하게 굳은 피가 제 색을 되찾고, 천장이 무너진 듯 내리던 눈이 그쳤다. 밤새 수많은 피를 흘린 저택에도 동이 텄다. 

 날이 밝자 알케나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연스레 구석에서 몸을 펴고 일어나 문 밖으로 향했다. 일련의 동작에 막힘이 없어 사람 몇을 죽이고 밤을 샌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키리에는 뻐근한 몸을 털고 일어나 뒤를 따랐다. 


 눈으로 덮인 땅을 밟으며 걸었다. 후텁지근했던 남작저의 밖은 갓 내린 눈의 짭쪼름한 물비린내와 새벽 공기가 뒤섞여 시원했다. 담벼락이 보일 거리까지 오자 투레질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세 필의 말은 알케나인을 보자 발을 눈밭에 굴렀다. 키나스톤의 암살자가 그 중 하나에 올라타는 것을 보며 키리에는 생각했다. 이로써 일은 끝난 것이다. 알케나인을 보내고, 아버지에게 이 일을 보고해 빠르게 이 사건을 수습하면, 이 일도 완전히 끝이 난다. 사건은 레마티온 남작의 광증으로 인한 일가족 살해로 기록될 테고 키나스톤과 파센느의 이름이 수면에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찰나, 알케나인이 어제의 그 대화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앞으로 키나스톤과 파센느는 교류가 많아지겠습니다."


 적색 눈동자가 뚜렷히 저를 응시했다. 그 말에 생략된 많은 것들을 모르지 않았다. 조만간 키나스톤 차기 후작과 연을 터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키리에는 수긍하려고 했다. 


 "…그렇지, 키리?"


 동의의 말을 내기도 전에 알케나인이 덧붙였다. 제 할 말이 끝나자 그는 말을 박차 키리에의 앞을 스쳐지나갔다. 대답할 새도 주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키리, 키리에. 예상하지 못한 노골적인 경고에 일순 이시스 키나스톤이 아닌, 알케나인 키나스톤으로 초점이 옮겨졌다. 당연히 키나스톤의 주시가 심해지리라 예상했으나… 머릿속에서 조만간 열릴 이름 있는 사교장의 날짜들을 떠올렸다. 그 중 알케나인이 나올 만한 것들도. 계산은 길지 않았다. 점차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키리에는 눈을 감았다. 


 "그러게, 알크 형."


 머지않은 미래의 재회를 희망하며. 그 말은 당분간 입 속에서 머물 것이었다. 

 날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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